서론: 선한 목자 예수 (시편 23:1-6)
주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한 목자로서 부족함 없이 인도하시고, 죽음의 골짜기에서 함께 하시며, 영원한 풍성함으로 채우신다.
청중: 20-60대 성도
설교 목적: 목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영원한 소망을 갖게 한다.
초점 진술(Focus Statement):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는 결핍, 고난, 죽음의 현실 속에서도 당신의 양을 완전히 돌보시며 영원한 풍요로 인도하신다.
기능 진술(Function Statement): 청중이 삶의 모든 순간—평온할 때나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나—예수님만을 목자로 신뢰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도록 촉구한다.
서론
◆ 서론 도입 예화: 아프가니스탄의 목자와 잃어버린 양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의 한 종군기자가 탈레반 점령 지역 근처에서 한 노인 목자를 목격했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그 목자는 폭격이 지나간 황무지를 홀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기자는 통역을 통해 물었습니다. ‘왜 여기 있습니까? 위험하지 않습니까?’ 목자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제 양 한 마리가 저 골짜기에 있습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그 양은 죽습니다.’
그 기자는 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시편 23편을 이해했다. 선한 목자는 자기 편의를 따라 양을 돌보지 않는다. 양이 어디에 있든, 얼마나 위험하든, 그는 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시편 23편은 단순한 위로의 시가 아닙니다. 이것은 죽음의 골짜기까지 내려오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 고백입니다. 다윗은 약 3,000년 전에 이 시를 썼지만, 사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골고다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실 한 목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시편 23편의 히브리어 원문을 여시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그가’, ‘그는’이라는 3인칭으로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4절에 와서 갑자기 ‘주께서’, ‘주의’라는 2인칭으로 전환됩니다. 왜 그럴까요? 죽음의 골짜기 앞에서는 더 이상 ‘그분에 대한 이야기’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인간은 직접적인 만남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이요, 임마누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선한 목자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완전한 목자로 나를 채우신다 (1-3절)
[말씀 선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3)
[분석]
1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단 두 단어로 시작됩니다. ‘יְהוָה רֹעִי(야훼 로이).’ 직역하면 ‘야훼—나의 목자.’ 동사조차 없습니다. 히브리어의 ‘명사문'(nominal sentence)은 최고의 확신과 영원한 현재를 표현합니다. ‘야훼가 나의 목자이다’—이것은 상황이 바뀌어도, 감정이 변해도, 처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존재론적 사실입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히브리어 לֹא אֶחְסָר(로 에흐사르)는 미완료형으로 ‘나는 결코, 어떤 경우에도 부족함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총체적 선언입니다. 이것은 물질적 풍요의 약속이 아닙니다. 목자가 주시는 것은 ‘필요한 것’이지 ‘원하는 모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목자와 함께하는 양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결핍이 없습니다.
2절의 ‘누이시며’—히브리어 יַרְבִּיצֵנִי(야르비체니)는 강제로 눕히는 것이 아니라 ‘쉬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양은 스스로 눕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필립 켈러(Phillip Keller)의 고전적 연구에 따르면, 양이 눕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합니다: 두려움의 제거, 다른 양들과의 갈등 해소, 기생충으로부터의 자유, 배고픔의 해소. 이 네 가지를 모두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목자의 역할입니다.
‘쉴 만한 물 가’의 히브리어 מֵי מְנֻחוֹת(메 메누호트)는 문자적으로 ‘안식의 물’, ‘고요한 물’입니다. 양은 물이 소용돌이치면 마시지 못합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 조용한 물가를 찾아줍니다.
3절 ‘소생시키시고’는 히브리어 יְשׁוֹבֵב(예쇼베브)로, שׁוּב(슈브, 돌아오다)의 사역형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원기 회복이 아니라 ‘길을 잃었던 것을 돌이키다’, ‘죽어가는 것을 살리다’는 의미입니다.
[해석]
이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은 요한복음 10:11에서 명백해집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ός, 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선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καλός(칼로스)는 단순히 도덕적 선함이 아니라 ‘아름다운’, ‘이상적인’, ‘완전한’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완전한 목자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요한복음 10:15에서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고대 근동의 어떤 목자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목자가 자기 양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사건입니다. 시편 23편 1-3절의 모든 동사—누이시며, 인도하시며, 소생시키시며—는 골고다에서 완성됩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절)—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한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 즉 자신의 언약적 신실함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43:25에서 하나님은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인간의 실상 폭로]
여러분, 솔직히 물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스스로 목자가 되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계획하고, 스스로 채우려 하고, 스스로 소생시키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양입니다. 양은 방향 감각이 없어서 가장 빨리 길을 잃는 동물입니다. 양은 스스로 먹이를 찾지 못하면 무력합니다. 양은 스스로 누울 수 없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목자가 되려 할 때마다, 당신은 길을 잃습니다. 현대인의 불안, 번아웃, 공허함의 뿌리는 여기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의 비극입니다.
[그리스도 연결]
그러나 오늘 이 시편은 선언합니다. ‘야훼—나의 목자.’ 그리고 신약은 그 목자가 누구인지 밝혀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시편 23편의 모든 동사를 친히 이루셨습니다. 2,000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진짜 양들 가운데 사셨고, 진짜 목자로 돌보셨으며, 마침내 자신의 목숨으로 양을 구속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분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27)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말적 그림자]
마지막 날, 어린 양의 혼인 잔치(계 19:9)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양들을 모두 거두실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계 7:16-17). 시편 23편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체험적 적용]
당신이 지금 무엇을 부족하게 느끼십니까? 재정입니까, 관계입니까, 건강입니까, 의미입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부족함을 선한 목자 앞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야훼 로이’—이것이 당신의 고백이 되게 하십시오. 그 고백이 상황을 즉시 바꾸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나의 목자임을 알 때, 부족함의 의미가 변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절망의 근거가 아니라 목자를 더 깊이 의지하는 계기가 됩니다.
[예화: 소생(蘇生)의 기적]
영국의 목양 전문가 필립 켈러는 자신의 저서 《목자의 시편》에서 이런 경험을 기록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양 한 마리가 ‘캐스트'(Cast) 상태—등이 땅에 닿아 뒤집어진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양은 뒤집어지면 가스가 차고 혈액순환이 막혀 몇 시간 안에 죽습니다. 켈러는 멀리서도 그 양을 발견하고 달려가 정성스럽게 세워 피를 다시 돌게 해주었습니다. 그 양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יְשׁוֹבֵב(예쇼베브)다. 스스로는 일어날 수 없는 양을 목자가 일으켜 세우는 것. 하나님은 영적으로 뒤집어진 우리를 그렇게 찾아오신다.’
성도 여러분, 당신은 지금 영적으로 뒤집어진 상태입니까?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는 상태입니까? 선한 목자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그분이 당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실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나와 함께 하신다 (4절)
[말씀 선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분석]
4절은 시편 23편의 심장부입니다. 문학적으로 볼 때 이 절은 전체 6절의 정중앙(3절과 4절의 경계)에 위치하며, 시편 전체의 축입니다. 히브리어를 보겠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히브리어 גֵּיא צַלְמָוֶת(게 찰마베트). 이 단어는 구약에서 단 9회 등장하며, 항상 극한의 위험, 두려움,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 사용됩니다(욥 3:5; 10:21; 렘 2:6). WBC 주석(Peter C. Craigie)은 이 단어가 ‘죽음이 실제적 위협으로 느껴지는 가장 어두운 상황’을 묘사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닐지라도(כִּי אֵלֵךְ, 키 엘렉)’입니다. 이것은 가정법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일어날 일에 대한 예상입니다. ‘나는 반드시 사망의 골짜기를 걷게 될 것이다.’ 인생에서 고통, 질병,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현실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다음에 있습니다. ‘כִּי אַתָּה עִמָּדִי(키 아타 임마디)’—’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여기서 강조점은 ‘함께(עִמָּדִי, 임마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골짜기에서 꺼내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골짜기 안에서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위로의 본질입니다.
‘지팡이(שֵׁבֶט, 쉐베트)와 막대기(מִשְׁעֶנֶת, 미쉬아넷)’—지팡이는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막대기는 올바른 방향으로의 인도를 상징합니다. 두 가지 모두 목자의 능동적 행위를 나타냅니다.
[해석]
4절의 ‘함께 하심’은 신약에서 임마누엘 사건, 곧 성육신으로 성취됩니다. 마태복음 1:23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기록합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עִמָּנוּ אֵל, 임마누 엘)’입니다. 시편 23:4의 ‘나와 함께'(עִמָּדִי, 임마디)는 임마누엘의 개인적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걸으신 사망의 골짜기는 어디입니까?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찰마베트'(사망의 그림자)를 예수님이 몸소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골고다에서 그분은 찰마베트 그 자체—십자가 위의 죽음—를 통과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목자는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사망의 열쇠를 가지신 이'(계 1:18)가 되셨습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다닌 자가 이제 그 골짜기를 함께 걷는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4:15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그분은 멀리서 위로하는 분이 아니라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신 분입니다.
[인간의 실상 폭로]
우리는 고통 앞에서 두 가지 유혹에 빠집니다. 하나는 ‘이 정도면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적 결론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뭔가 잘못해서 이런 고통이 온다’는 정죄입니다. 그러나 시편 23편 4절은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합니다. 사망의 골짜기는 불신앙의 증거도 아니고, 죄의 결과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통과하는 삶의 실존입니다. 중요한 것은 골짜기를 피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안에서 목자가 함께 하시느냐 아니냐입니다.
성도 여러분, 솔직히 고백하십시오. 고통의 골짜기 앞에서 당신은 하나님을 포기하고 싶었습니까? 아니면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세상의 것들로 그 공간을 채우려 했습니까? 둘 다 목자 없이 골짜기를 걷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연결]
예수님은 찰마베트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골짜기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이사야 53:4은 예언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목자 예수님은 당신이 걷고 있는 그 골짜기를 이미 걸으셨습니다. 더 깊이, 더 어둡게. 당신이 혼자가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종말적 그림자]
요한계시록 21:4은 약속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찰마베트(사망의 골짜기)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목자를 따르는 양에게 사망의 골짜기는 하나의 통로일 뿐, 종착지가 아닙니다.
[체험적 적용]
지금 사망의 골짜기를 걷고 계십니까? 암 진단을 받으셨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셨습니까? 경제적 파탄 앞에 서 계십니까? 관계의 깊은 상처 속에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당신에게 드리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키 아타 임마디).’ 그분은 당신보다 먼저 그 골짜기를 통과하셨습니다. 그분의 지팡이가 지금도 당신 곁에 있습니다.
[예화: 토마스 굿윈의 경험]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은 중병에 걸렸을 때 이런 일화를 남겼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시편 23편 4절을 반복해서 읽으며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저는 지금 사망의 골짜기를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도 이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것도 저보다 훨씬 더 어두운 길을. 그러니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는 후에 회복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 병상에서 하나님을 잃은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찾았다. 골짜기는 목자를 잃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자를 더욱 가까이 발견하게 한다.’
시편 23편 4절의 위대한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빛이 충만한 초원에서는 목자를 멀리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두운 골짜기에서는 목자를 가장 가까이 느낍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그분의 팔에 안겨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 현대적 예화: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고백
2009년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은 임종 직전에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지금 어두운 골짜기를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길의 끝에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이분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 고백은 시편 23편 4절의 완벽한 현대적 증언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신앙의 어느 진영에 속했느냐를 물으시기 전에, 먼저 그 골짜기에 함께 내려오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풍성함으로 나를 채우신다 (5-6절)
[말씀 선포]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5-6)
[분석]
5절에서 은유가 목자와 양에서 주인과 손님으로 전환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문학적 전환입니다. 양의 은유가 우리의 연약함과 의존성을 강조했다면, 손님의 은유는 우리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공개적 인정을 강조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히브리어 תַּעֲרֹךְ לְפָנַי שֻׁלְחָן נֶגֶד צֹרְרָי(타아로크 레파나이 슐한 네게드 초레라이). 핵심은 ‘원수의 목전에서(네게드 초레라이)’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먼저 없애고 나서 잔치를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 앞에서 당신의 백성을 귀빈으로 대접하십니다. 이것은 공개적 명예 회복이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의 선언입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히브리어 דִּשַּׁנְתָּ בַשֶּׁמֶן רֹאשִׁי(디샨타 바쉐멘 로쉬). ‘부으셨다’의 동사 דָּשַׁן(다샨)은 ‘살찌게 하다’, ‘풍성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최고의 환대와 존귀함의 표시였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히브리어 כּוֹסִי רְוָיָה(코시 르바야). ‘넘치나이다’의 רָוָה(라바)는 ‘흠뻑 적시다’, ‘충만히 적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잔이 가득 찬 것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6절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따르다’의 히브리어 רָדַף(라다프)는 본래 ‘추격하다’, ‘맹렬히 뒤쫓다’는 의미입니다. 주로 부정적 문맥(원수가 쫓다, 군대가 추격하다)에 사용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헤세드(언약적 사랑)가 그 동사를 취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맹렬히 추격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려 해도, 그분의 헤세드가 우리를 추격합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히브리어 וְשַׁבְתִּי בְּבֵית יְהוָה לְאֹרֶךְ יָמִים(베샤브티 베베이트 야훼 레오레크 야밈). ‘영원히’의 히브리어 לְאֹרֶךְ יָמִים(레오레크 야밈)는 문자적으로 ‘날들의 길이를 따라’, 즉 ‘무한히 긴 날들 동안’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긴 시간이 아니라 영원성을 지시합니다.
[해석]
5-6절은 시편 23편의 결론이자 절정입니다. 이 두 절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차려주신 상’은 최후의 만찬(마 26:26-29)과 어린 양의 혼인 잔치(계 19:9)에서 성취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셨을 때, 그것은 당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자리였지만 동시에 원수(사탄, 죽음)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는 자리였습니다. 십자가는 원수의 목전에서 차려진 구원의 상입니다.
‘머리에 기름 부음’—헬라어로 기름 부음은 χρίω(크리오)이며, 그리스도(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의 어원입니다. ‘그리스도’는 곧 ‘기름 부음 받은 자'(メシア,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기름 부음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기름 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행 2:33). 오순절 성령 강림은 시편 23:5의 ‘기름 부음’이 신약에서 완성되는 사건입니다.
‘넘치는 잔’은 요한복음 10:10에서 명확해집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은 ‘충분한’ 생명이 아니라 ‘풍성한(περισσόν, 페리손)’ 생명입니다. 넘치는 잔의 신약적 성취입니다.
마지막으로 6절의 헤세드(인자하심)가 우리를 ‘추격한다’는 표현은 탕자의 비유(눅 15:20)에서 완성됩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가 먼저 달려가는 모습, 이것이 히브리어 라다프(추격하다)의 복음적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멀리서 기다리지 않습니다. 달려옵니다.
[인간의 실상 폭로]
현대 기독교인들이 빠지는 가장 위험한 착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 순종에 비례한다’는 거래적 신앙입니다. 잘 살면 잔이 넘치고, 못 살면 잔이 비는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시편 23:6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우리를 ‘추격한다’고. 우리가 도망가도, 우리가 배반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려도 그분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쫓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나 행위에 반응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일방적 헤세드입니다.
오늘 여기 계신 분 중에 ‘나는 너무 많이 실패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6절의 메시지는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당신의 자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추격합니다.
[그리스도 연결]
예수님의 십자가는 ‘원수의 목전에서 차려진 상’의 완성입니다. 사탄은 십자가가 자신의 승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원수의 면전에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 구원의 상을 차리신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은 원수가 지켜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 상에 초대받은 손님들입니다. 값없이, 자격 없이, 오직 목자의 은혜로.
[종말적 그림자]
요한계시록 19:9은 선언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 잔치는 원수(사탄, 죽음, 지옥)가 완전히 무력화된 후에 열립니다. 시편 23:5의 ‘원수의 목전에서 차려진 상’은 계시록 19장에서 완성됩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최후에 자신의 양들을 이 잔치로 초대하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소망입니다.
[체험적 적용]
오늘 당신의 잔은 어떻습니까? 비어 있습니까? 넘치고 있습니까? 잔을 채우는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목자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주님, 제 잔을 채워 주십시오. 제 인생의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그 고백이 당신의 신앙을 바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선한 목자는 지금 이 순간도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요 10:27)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화: 코리 텐 붐과 넘치는 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은 라벤스브뤽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수용소에서 우리는 이(虱) 때문에 극도로 고통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이 때문에 간수들이 우리 막사 안으로 들어오기를 꺼렸고, 그로 인해 우리는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시편 23편 5절을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신다고. 심지어 이(虱)도 그 상의 일부였습니다.’
그녀는 수용소에서 해방된 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하나님의 헤세드가 나를 추격했습니다. 나는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당신의 삶에서 ‘이(虱)와 같은 것들’—이해할 수 없는 고통, 원하지 않는 환경—이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상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차리십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 한국 현대 예화: 이어령 교수의 임종 고백
대한민국의 저명한 문화비평가 이어령 교수는 2022년 2월 26일 소천하시기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지식으로 신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그분이 나의 목자이심을 알았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제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지성의 거인이 죽음의 골짜기 앞에서 시편 23편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헤세드는 그를 평생 추격하다가 마침내 그의 임종 침대에서 붙잡았습니다.
결 론
◆ 서론 예화 재언급
기억하십니까? 서론에서 말씀드린 아프가니스탄의 목자 이야기를. ‘제 양 한 마리가 저 골짜기에 있습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그 양은 죽습니다.’ 그 목자가 폭격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묵상한 시편 23편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과 지옥이라는 가장 위험한 골짜기로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 대지 요약
오늘 우리는 세 가지 진리를 묵상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완전한 목자로 우리를 채우십니다. 부족함 없이 먹이시고, 쉬게 하시며,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사망의 골짜기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골짜기에서 꺼내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지만, 골짜기 안에서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그 골짜기를 통과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차리시며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추격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집으로 데려가십니다.
◆ 인간의 위치 재확인
우리는 양입니다. 스스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소생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골짜기를 건널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잔을 채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한 목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력함은 그분의 전능하심을 향한 문입니다.
◆ 십자가 재선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시편 23편 전체의 완성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요 10:15). 사망의 골짜기를 친히 통과하셨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구원의 상을 차리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여호와의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야훼 로이—나의 목자’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오늘의 결단 촉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설교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목자이십니까?’ 지식으로 아는 것과 삶으로 고백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어령 교수는 지식으로 신을 알다가 임종에서야 목자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임종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그 고백을 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지금 눈을 감으시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예수님, 당신이 나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나는 당신의 양입니다. 내 인생의 지팡이를 당신의 손에 드립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원수의 목전에서도, 당신의 인자하심이 나를 영원히 따를 줄 믿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 고백이 오늘 이 자리에서 나오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 도 문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시편 23편의 말씀을 통해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만나게 하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양인지, 스스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사망의 골짜기를 걷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질병으로, 상실로, 외로움으로, 두려움으로 어두운 골짜기를 걷고 있는 그 분들에게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살아있는 위로로 다가가게 해주시옵소서.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지금 이 순간도 그들과 함께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해주시옵소서.
또한 아버지, 풍요 속에서도 목자를 잃어버린 삶을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채워져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공허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오늘 ‘야훼 로이—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이 그들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게 해주시옵소서. 스스로 목자가 되려는 교만을 내려놓고 그분의 양으로 살게 해주시옵소서.
선하신 하나님, 당신의 헤세드—언약의 인자하심이 오늘도 우리를 추격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멀어졌어도, 아무리 실패했어도, 당신의 선하심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심을 감사합니다. 탕자를 향해 달려가신 아버지처럼, 당신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이 자리에서 선한 목자를 처음 만난 분들이 있다면, 그 만남이 평생의 만남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이미 목자를 알고 있는 우리 모두가, 오늘 말씀을 통해 그 관계를 더 깊이 하게 해주시옵소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 분석 개요
① 원문 주해
시편 23편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 가운데 하나로, 다윗의 시(מִזְמוֹר לְדָוִד, 미즈모르 레다비드)로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 어휘를 원어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יְהוָה רֹעִי (야훼 로이) – ‘여호와는 나의 목자'(1절). 히브리어 רָעָה(라아)는 단순히 양을 먹이는 행위를 넘어, 총체적으로 돌보고 이끌며 보호하는 포괄적 목양 사역을 의미합니다. 목자 은유는 고대 근동에서 왕권과 신의 통치를 상징하였으며(겔 34; 요 10:11),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자 신적 목자이심을 선언합니다.
• לֹא אֶחְסָר (로 에흐사르) –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חָסֵר(하세르)는 ‘결핍’, ‘빈곤’을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된 미완료형 동사입니다. 미완료형은 현재부터 미래까지 지속되는 상태를 나타내므로, 이것은 단회적 공급이 아닌 계속적·총체적 충족의 선언입니다.
• יְנַהֲלֵנִי (예나할레니) – ‘인도하시는도다'(2절). נָהַל(나할)의 피엘형(사역형)으로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이끌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 40:11의 ‘어린 양을 품에 안으시며’와 동일한 사역적 돌봄의 이미지를 전달합니다.
• יְשׁוֹבֵב נַפְשִׁי (예쇼베브 나프시)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3절). שׁוּב(슈브)의 폴렐형으로 ‘돌아오게 하다’, ‘회복시키다’의 뜻입니다. נֶפֶשׁ(네페쉬)는 단순한 영혼이 아니라 인간 전인격, 생명력 자체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쇠진한 인간의 생명력 전체를 회복시키신다는 선언입니다.
• גֵּיא צַלְמָוֶת (게 찰마베트)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4절). צַלְמָוֶת(찰마베트)은 전통적으로 ‘죽음의 그림자'(shadow of death)로 번역되는 합성어로, 죽음의 두려움과 짙은 어둠이 결합된 극한의 위험 상황을 묘사합니다. WBC 주석은 이 단어가 단순한 어둠이 아닌 ‘죽음에 가장 근접한 압도적 위협’임을 강조합니다.
• שִׁבְטְךָ וּמִשְׁעַנְתֶּךָ (쉬브테카 우미쉬안테카)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4절). שֵׁבֶט(쉐베트)는 목자의 보호용 몽둥이(방어), מִשְׁעֶנֶת(미쉬아넷)는 안내용 지팡이(인도)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동시에 표현된 이중 상징입니다.
• טוֹב וָחֶסֶד (토브 바헤세드) – ‘선하심과 인자하심'(6절). חֶסֶד(헤세드)는 언약적 사랑, 신실한 돌봄을 의미하는 구약의 핵심 신학 개념입니다. 이것이 ‘따르다'(רָדַף, 라다프)로 표현되는데, 이 동사는 본래 ‘추격하다’, ‘맹렬히 뒤쫓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우리를 추격한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② 양식/구조/배경
시편 23편은 개인 신뢰 시편(Individual Psalm of Trust)으로 분류됩니다. 다윗의 목동 시절 경험(삼상 16-17장)을 영적 고백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총 6절이 두 개의 중심 은유를 통해 구성됩니다: (1) 목자와 양의 은유(1-4절), (2) 잔치 주인과 손님의 은유(5-6절). WBC 주석(Peter C. Craigie)은 이 시편이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실제적인 위험과 원수의 존재를 전제하면서도 야훼의 현존으로 인한 담대한 신뢰를 고백하는 신앙 고백시임을 강조합니다.
③ 해설
본문의 전환점은 4절에 있습니다. 1-3절은 3인칭(‘그가’, ‘그는’)으로 야훼를 묘사하다가, 4절에서 갑자기 2인칭(‘주께서’, ‘주의’)으로 전환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기법이 아니라 신앙의 실존적 선언입니다. 멀리서 고백하던 신앙이 죽음의 골짜기 앞에서 인격적 만남의 신앙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 구조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의 예형론적 그림자입니다.
2) 본문 구조 분석
① 반복 단어
• ‘인도하시다’ (나할/나하, 2절·3절) – 반복을 통한 총체적 인도의 강조
• ‘나를/내게/내’ – 1인칭 단수의 반복으로 개인적·인격적 관계 강조
• ‘여호와/주께서’ – 신적 주권자의 반복적 등장
② 대조 구조
• 푸른 풀밭·쉴 만한 물 가(안식)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위험)
• 부족함 없음(풍요) ↔ 사망의 골짜기(결핍/위협)
• 원수의 목전(적대) ↔ 상을 차려 주심(보호/축복)
③ 점층 구조
부족 없음(1절) → 생리적 안정(2절) → 영적 회복(3절) → 죽음의 극복(4절) → 원수 앞의 잔치(5절) → 영원한 거주(6절)의 점층적 상승 구조를 보입니다.
④ 결론 구절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이것은 단순한 소망이 아닌 언약에 근거한 확신의 선언입니다.
⑤ 스펄전식 구조적 추출 전략 4단계
1단계 (동사의 주체 분석): 본문의 모든 주요 동사의 주어는 ‘야훼/주’입니다. 누이시며, 인도하시며, 소생시키시며, 함께 하심, 안위하시나이다, 차려 주시고, 부으셨으니. 인간은 오직 수동적 수혜자(양)입니다. 설교 방향: ‘당신은 스스로 목자가 되려 하지만, 당신은 양입니다’ – 인간의 자기 구원 시도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 주권으로 귀결시킨다.
2단계 (어휘 어원 분석): חֶסֶד(헤세드, 인자하심)의 본래 의미는 ‘언약적 충성’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רָדַף(라다프, 추격하다)와 결합됩니다. 설교 방향: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도 그분의 헤세드가 우리를 추격합니다. 청중의 가짜 신앙—하나님이 우리 행위에 반응한다는 거래적 신앙—을 폭로합니다.
3단계 (구조적 병행법): ‘푸른 풀밭/쉴 만한 물 가'(2절), ‘영혼 소생/의의 길 인도'(3절), ‘지팡이/막대기'(4절), ‘선하심/인자하심'(6절)의 연속적 이중 병행은 파상공격처럼 하나님의 충분하심을 반복하여 청중의 불안과 불신을 몰아붙입니다.
4단계 (예수 중심 반전): 시편 23편의 ‘목자’는 요한복음 10:11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됩니다. 찰마베트(죽음의 골짜기)를 실제로 걸어가신 분은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목자가 양을 위해 생명을 버리신 사건입니다(요 10:15).
3) 하나님의 동사 찾기
①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 누이시며(야르비체니), 인도하시며(예나할레니), 소생시키시고(예쇼베브), 인도하시며(얀헤니), 함께 하심(임마디), 안위하시나이다(예나하무니), 상을 차려 주시고(타아로크), 기름을 부으셨으니(닷샨타), 따르리니(예라드페니)
② 하나님이 무엇을 인정하시는가: 원수 앞에서도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며 존귀하게 여기심을 인정하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심’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심의 선언입니다.
③ 하나님이 무엇을 심판하시는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더 이상 성도를 해하지 못하도록 그 권세를 제한하십니다. 원수를 완전히 무력화시키시며(원수의 목전에서 잔치), 결국 그의 집(성전/하늘)이 영원한 처소가 됨으로써 악의 세력에 대한 최후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각 주
1) Peter C. Craigie, Psalms 1-50,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9 (Waco: Word Books, 1983), 204-210. Craigie는 시편 23편을 ‘개인 신뢰의 시'(individual psalm of trust)로 분류하며 목자 은유의 고대 근동적 배경을 상세히 분석한다.
2) 히브리어 יְהוָה רֹעִי(야훼 로이)는 명사문(nominal sentence)으로 동사 없이 현재적 사실을 강조한다. GKC §141 참조.
3) חֶסֶד(헤세드)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Nelson Glueck, Hesed in the Bible (Cincinnati: Hebrew Union College Press, 1967) 참조. 헤세드는 언약 관계에 근거한 변치 않는 충성과 사랑을 의미한다.
4) רָדַף(라다프)의 용례 분석은 BDB Lexicon 922-923 참조. 이 동사는 시편 23:6에서 매우 특이하게 하나님의 속성을 주어로 취하여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5) 요한복음 10:11의 ποιμὴν ὁ καλός(포이멘 호 칼로스)에서 καλός는 단순한 도덕적 선함이 아닌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이상적인’을 의미한다. BDAG Lexicon 505 참조.
6) Phillip Keller, A Shepherd Looks at Psalm 23 (Grand Rapids: Zondervan, 1970), 35-47. 켈러는 실제 목양 경험을 바탕으로 시편 23편을 해석하여 목자와 양의 관계를 생동감 있게 설명한다.
7) 히브리어 צַלְמָוֶת(찰마베트)에 대한 어원 분석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צֵל(첼, 그림자) + מָוֶת(마베트, 죽음)의 합성어, (2) 단일 어근 צלמת의 파생어. WBC는 전자를 지지한다(Craigie, 205).
8) 임마누엘 개념의 구약적 배경과 신약적 성취에 대해서는 G. K. Beale & D. A. Carson (eds.),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7), 3-4 참조.
9) 코리 텐 붐의 수용소 경험은 Corrie ten Boom, The Hiding Place (Washington Depot: Chosen Books, 1971) 참조.
10) 이어령 교수의 임종 고백은 2022년 2월 조선일보 인터뷰 및 이어령, 《마지막 수업》(열림원, 2021) 참조.
참고문헌
■ 주석 및 학술자료
Craigie, Peter C. Psalms 1-50.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9. Waco: Word Books, 1983.
Allen, Leslie C. Psalms 101-150.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21. Waco: Word Books, 1983.
Goldingay, John. Psalms Volume 1: Psalms 1-41. Baker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6.
Mays, James L. Psalms. Interpretation: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94.
VanGemeren, Willem. Psalms.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2008.
■ 원어 연구
Brown, F., Driver, S. R., & Briggs, C. A.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Oxford: Clarendon Press, 1907 (repr. 1977).
Danker, F. W. (ed.).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3rd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Gesenius, W. Hebrew Grammar. Edited by E. Kautzsch and A. E. Cowley. 2nd ed. Oxford: Clarendon Press, 1910.
Glueck, Nelson. Hesed in the Bible. Cincinnati: Hebrew Union College Press, 1967.
■ 설교 및 목양 자료
Keller, Phillip. A Shepherd Looks at Psalm 23. Grand Rapids: Zondervan, 1970.
Spurgeon, C. H. The Treasury of David. 3 vols.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88.
Beale, G. K. & Carson, D. A. (eds.).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7.
■ 전기 및 일반 자료
ten Boom, Corrie. The Hiding Place. Washington Depot: Chosen Books, 1971.
이어령. 《마지막 수업》. 서울: 열림원, 2021. Goodwin, Thomas. The Works of Thomas Goodwin, Vol. 3. Edinburgh: James Nichol, 1861.
